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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별 것 없어요.

ㅋㅋ

휴가를 마치고 오니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곳곳에 적힌 내 이름을 보니 돌아올 곳임을 새삼 느낀다.
#동경비둘기끝
#혜화동비둘기
#홈페이지생겼어요
wal.am

그간 봐왔던 신호등과는 조금 다른, 아마 구식으로 추정되는 신호등을 만났다. 세대교체에서도 살아남아 묵묵히 할 일을 다 해주는 뭔가를 만나면 박수를 치고 싶어진다.
진보초의 글리치 커피로 향했다.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는 글리치지만 그래도 꼭 직접 와서 맛보고 싶었다. 동생이 사다 준 원두를 참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파나마 게이샤와 코스타리카 COE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음이 게이샤 쪽으로 기울고 있었는데 마침 직원이 게이샤를 더 추천한다고 했다. 아침부터 이런 커피를 다. 참 호강하는구나 싶었다. 글리치가 왜 좋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어감의 영향이 참 큰 것 같다.
걷다 보니 다섯 명쯤 되는 아저씨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서 계셨다. 가게 안을 슬쩍 보니 아직 오픈 전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오픈하기도 전에 줄을 서 있는 곳이라니 뭘까. 따라 줄을 섰다. 조금 이른 점심을 먹으면 그만이지 싶었다. 어느새 내 뒤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께서 직접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차례대로 주문을 받는데 모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카츠 카레를 외치시길래 따라서 카츠 카레 구다사이를 외쳤다. 수저로 설거지를 했다.
둘째 날 셔츠를 샀을 때 점원이 추천해 줬던 바지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여러 곳에서 여러 바지를 입어봐도 대체가 안 됐다. 사기로 했다. 매장에 터벅터벅 들어가 직원의 추천대로 혹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걸 그대로 벗겨 별 고민 없이 상하의를 덜컥 계산하는 그 느낌. 약간의 졸부스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그거. 완벽하진 않지만 해보기로 했다. 마침 멀지 않은 도쿄역에도 매장이 있었다.
매장을 둘러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직원이 하필 예의 그 바지를 대뜸 들이밀며 나에게 보여줬다. 그 셔츠를 입은 것도 아닌데. 요즘 미는 바지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다시 입어봤다. 역시 좋았다. 샀다.
걷다가 빔즈가 보이길래 들어갔다.로고 반팔 티가 보였다. 엄마와 아빠가 색만 다른 빔즈 반팔을 함께 입으신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게 좀 재밌었다. 평소라면 절대 못 봤을 그런 모습이라서. 그래서 샀다.
지하철을 타고 기요스미쪽으로 향했다. 더 크림 오브 더 크롭 커피는 굉장한 크기의 로스팅 머신이 입구부터 곧장 보인다. 카페가 아닌 로스팅 공장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설명한다. 그래도 마시겠다면 내어는 주겠다는 느낌의 커피바와 과장님 사무실이 연상되는 소파와 옷걸이가 귀여웠다. 기본기만 쏙쏙 뽑아 담아낸 맛이었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에 자꾸 눈이 갔다.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다가 어라이즈 커피로 향했다. 이 공간은 이 사람이 아니면 운영할 수 없겠구나- 싶은 곳이었다. 생소한 원두들이 제법 보였고 몇 개를 추천해주시길래 향을 맡아보고 선택했다. 어딘가 숙성의 느낌이 자욱한 딸기향의 커피가 좋았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길래 한국이라 답하니 프릳츠를 아냐면서 드립백을 꺼내 보여주셨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 핸드폰 케이스를 보여드렸다. 빛이 바랠 대로 바랜 프릳츠의 케이스를. 사장님도 손님도 나도 웃었다.
구라마에라는 동네로 향했다. 도쿄로 건너와 일을 하는 친구와 연락이 닿아 저녁 커피를 하기로 했다. 친구의 퇴근이 늦어져 혼자 카부키로 향했다. 나는 일본어를 못 했고 점원분은 영어를 거의 못 하셨다. 메뉴를 손으로 가르키며 지시대명사와 형용사 위주로 동사는 없는 설명을 해주셨다. 다크 로스트와 스파이시. 비터와 크리미. 주어진 정보로 3번 커피와 3번 초콜릿을 골랐다.
한국에서도 굳이 비슷한 곳을 찾자면 몇 군데를 떠올릴 수 있을 인테리어였으나 내 마음이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여행자의 마음이 그렇다. 차분히 융드립을 내리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으나 그 엄숙함을 내가 깨고 싶지 않아 계산을 하실 때만 조심히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걸까 싶어 열심히 파파고를 만지작거렸다. 번역기가 무리 없이 마음을 전해줄 수 있도록 간결한 문장을 만들었다. 계산을 하고는 번역된 것들을 보여드렸고 사장님은 문밖으로 따라 나와 배웅을 해주셨다. 이번엔 동사로 질문을 하시고 관용구로 맺음을 지어주셨다. 말보다는 마음이 다했다.
친구를 만났다. 3년만인가 싶었다. 여기서 만나니 괜히 더 반가웠다. 라멘을 먹고 근황을 나눴다. 이미 반가웠는데 또 반가웠다.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셨다. 가라아게까지 먹었으니 이젠 정말 모든 걸 했구나 싶었다. 이제 공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동경비둘기6일차

체크 아웃을 하고 캐리어를 끌었다. 신주쿠로 향했다. 4일 만에 지하철을 탔다. 아카사카라는 동네에 꽤 정이 들었는데 어쩌나 싶었다.
아침의 신주쿠 거리에는 담배꽁초들이 단체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일어날 기미는 안 보였다. 내가 그렇게 일찍 온 것도 아닌데. 뽀글 머리 남자가 나를 향해 ‘두유 라부 세엑스?’ 외쳤다. 마침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묵묵히 지나갔다. 어떤 음악이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신주쿠식 인사인가? 생각했다. 곤니치와도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도 이 동네에서는 힘을 잃는 건가. 그럼 난 이곳의 모든 이와 인사를 나눌 수 없겠네 싶었다.
새 숙소는 신주쿠보다 살짝 윗동네. 신오쿠보라는 곳에 있다. 지나는 길목에 갑자기 익숙한 글자들이 즐비했다. 굽네 치킨, 철든 놈, 본가 설렁탕. 뭐지 이 동네? 싶었다. 알고 보니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란다.
짐을 맡기고 모처럼 또 지하철을 탔다. 가미이구사라는 동네에 가고 싶던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다.
작은 동네였다. 10시쯤이었고 다행히 샌드위치는 많이 남아있었다. 손짓과 마음을 동원해 후르츠 산도와 치킨카츠 산도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커피 우유를 샀다.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소통할 수 있다. 고 왈이가 그랬다. 역시라니까 생각하고 걷다 만난 연못이 있는 공원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제야 알았지만 치킨이 아닌 생선이었다. 소통의 실패. 내 마음이 박한 탓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크림과 과일 혹은 생선튀김과 와사비맛 소스. 대단할 거 없어 보이는 이런 게 대단한 기분을 선사한다. 나도 완전히 별 것 아닌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치조지로 걸었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의 ost를 틀었는데 영화의 색감과 눈앞의 색감이 썩 비슷해 괜찮은 선곡이라고 생각했다. 기치조지에 들어섰을 땐 델리스파이스의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를 들었다.
걱정이 없을 듯한 동네였다. 너무 친절한 샵 직원을 만났다. 온 마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이번엔 잘 전해졌겠지. 남을 위한 소비도 했다. 이리저리 구경하고 라이트 업 커피를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우선 맛을 보라며 작은 종이컵을 건네줬다. 여기는 시음용 그 작은 종이컵을 줄 때도 꼭 각얼음 한 개를 곁들여낸다. 그 3cm 정방형의 마음이 좋다. 아메리카노는 맛보았던 브루잉 커피와 같은 싱글 오리진으로 내려줬다고 했다. 좋은 커피 한 잔이 삶을 라이트-업 시킬 수 있다는 그들의 모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점심은 텐동을 먹었다. 찾아간 집이었다. 바닷장어 튀김이 올라간 가장 비싼 프리미엄 텐동을 시켰다. 얏빠리 프리미엄이랄까...의 맛이었다. 컵에 들어있던 서리태 두 쪽에 마음이 동했다.
이노가시라 공원을 휘적이다 사찰에 들렀다. 향냄새를 맡다가 지하철을 타고 리틀 냅 커피에 가장 가까운 역으로 향했다. 홍차 같은 향에 균형이 좋은 커피였다. 매일 오후 다섯시를 이런 밝기로 지내고 싶었다. 조도가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옆자리 앉은 일본인 형의 (멋지면 다 누나와 형이다.) 스타일이 대단했다. 모자와 안경은 나와 흡사했는데 바지와 셔츠의 조화가 훌륭했다. 한 수 배웠다. 옆자리 센세 아리가또.
일본의 옷들은 디테일도 좋지만 소재와 색감 그리고 실루엣에 공을 많이 들인다. 그게 좋다.
바람도 하늘도 너무 좋아 또 동네를 빙빙 돌고 구경하다 어둑해졌을 때 푸글렌을 찾았다. 아메리카노 더블을 주문했다. 샷을 잔에 미리 받은 후 내 눈앞에서 뜨거운 물을 바로 부어주는 시연이 흥미로웠다. 싱글 오리진인지 블렌딩인지 물어보니 온두라스 싱글 오리진이라고 했다. 아메리카노보다는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질감과 맛이었다. 아오리 사과가 퍼뜩 떠올랐다. 그렇게 터져놓고는 부드럽게 곧장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맛이 좋았다. 모호한 시간보다는 이른 오전이나 늦은 밤이 어울릴 법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밤의 신주쿠는 시끄러웠다. 예의 그 짜증 나던 인사가 소음에 묻혔으려나 생각했다. 내 귀에만 들리지 않으면 다행인 걸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이번 숙소는 정말로 캡슐 호텔답다. 공간을 기획한 사람이 드래곤볼에 심취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호이포이 캡슐이 떠오른다. 욕조가 딸린 샤워부스가 비어 있길래 몸을 좀 녹였다.
오늘의 향기는 몇월의 그리움으로 남을까. 언니네 이발관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동경비둘기5일차

눈 뜨자마자 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는 동안 리버풀은 챔스 4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야호!
날이 흐렸다. 저녁엔 비가 올 거라는 예보도 있었다. 흐릴 때도 되긴 되었지. 하는 생각과 그래도 맑았으면.의 생각이 공존했다. 우산은 안 챙겼고 때때로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이 바람에 비까지 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텐데. 불안했다.
공원은 대부분 들른다. 넴커피로 가는 길에도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다른 공원들이 도심의 공원 같다면 여긴 도심의 숲이었다. 히노끼스런 냄새가 났다. 향수로 담아두고픈 그런 냄새.
연못엔 무척 큰 잉어가 있었고 느리지만 꾸준하게 움직이는 거북이도 있었다.
베테랑 드라이버의 완벽한 주차처럼 넴커피는 골목 속에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따뜻함, 아늑함. 온기가 떠오르는 단어라면 다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사과 맛과 계피 향이 기분 좋은 커피를 들이켜고 책을 좀 읽다 나왔다.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내 몇 초 만에 쏟아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곧장 옆에 있는 마트로 피신했다. 일회용 우산을 사야 할까 고민하다 우선 식료품 코너를 충실하게 구경했다. 꼼꼼하게 한바퀴 돌고 나오니 비가 그쳤다. 하늘은 갰고 바람은 시원했다. 지나가야할 소나기가 지나갔다. 늘 그렇듯 만나기 전이 불안하고 지나가면 별 게 아니다. 이 한바탕 소나기 이후로는 계속 날이 좋았다.
산겐자야로 향했다. 경의선 철길같이 쭉 이어진 공원을 걸었다. 산겐자야는 주택가라는 말로는 모호한 그야말로 동네였다. 노지 커피에서는 오마카세로 싱글 오리진을 마셨다. 마루야마도 그렇고 여기도 필터로 거르지 않은 프레스 커피를 내어준다. 유분의 풍부함을 건네주기 위함이라나. 내추럴 커피답게 과일 향이 대단한데 끝이 놀랍도록 깔끔했다. 모호한 층을 잘 살려낸 공간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이름 모를 가게의 라멘을 비우고 동네를 빙빙 돌았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은 거세 거리에는 쓰러진 것들이 많았다. 입간판, 자전거 등등의 것들. 몇 개는 일으켜 세워주기도 했는데 다들 별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다.
옵스큐라 커피는 문을 닫았다. 휴일이 바뀌었다나. 내가 장날의 주인공이라니. 문에 붙은 종이를 읽을 수는 없으나 느낌으로 이해했다. 다행히 산겐자야에는 옵스큐라 라보라토리 매장이 존재한다. 괜히 라보라토리로 발음해준다. 이게 재밌다. 이곳의 사이폰을 마시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저렴하지만 좋은 브라질 커피를 만났다. 잠시 앉아있는 동안 바깥 바람이 문을 열었다 닫았다 들어오는 게 좋았다. 내 멋대로 커핑 노트를 적어보자면 간지러운 바람과 현악기의 음악이었다. 옵스큐라에서는 그런 기분을 가졌다.
일본 민예관으로 향했다. 공예품을 볼 땐 만들었을 이의 눈과 손이 궁금해졌다. 어떤 방에 들어가니 잠시 숨이 막혔다. 작품들의 색이 날 눌렀는지 형이 눌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다. 잠시 복도 의자에 앉아 숨을 다듬었다. 목조 건물의 서늘함이 좋았다. 일순간 마음이 개운해졌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감은 적은 없는데 마음이 감겼다. 마음이 잠을 잤나. 속잠을 잔걸까. 속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고요한 이 마음을 속잠이라 부르기로 했다. 괜히 더 평화로웠다. 후로 이 동네 저 동네를 걸어 돌아올 땐 사진을 별로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선명한 때가 아니었나 싶었다.
내일은 신주쿠로 숙소를 옮긴다.
#동경비둘기4일차

기분 나쁜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뭐지, 비상사태인가? 당황하여 살펴보니 알람 소리다. 아무리 랜덤이래도 그렇지.
악몽 비스끄무리한 이상한 꿈을 꿨다. 캡슐 호텔 생각보다 아늑하다. 라고 친구에게 말해 놓고는 머쓱하여 친구에게 악몽을 꿨다. 고 하니 친구는 타지에서의 악몽도 경험이지 않겠느냐 했다. 그건 맞는데 배경이 한국이라 좀 억울했다고 전했다. 그런 농담을 나누며 에비스를 향해 걸었다.
사루타히코 커피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기본 블렌딩을 택했고 균형감이 참 좋았다. 점원은 웃음이 떠나는 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밝은 분이었다. 맛있었다고 전하며 문을 나서는데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 나와 배웅해주셨다. 가던 사람 고개도 돌리게 만드는 이런 친절함에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츠타야를 그리며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다이칸야마는 어딘가 눈에 들어오는 색감이 달랐다. 햇볕이 편애하는 지역일까? 생각했다. 제대로 된 휴양지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휴양지가 떠올랐다. 츠타야는 과연이었다. 책도 책이고 공간도 공간. 그 배치와 동선을 따라 나를 이끄는 흐름이 좋았다. 라이프, 라이프 또 라이프!
도쿄의 브랜드샵 중 가장 궁금하던 샵을 찾아갔다. 아파트먼트 스토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 일반 맨션의 2층에 들어서 있다. 초인종을 누르면 점원이 안에서 문을 열어 준다. 문밖이나 안이나 마음 200%의 공간이었다.
쇼핑 리스트 같은 건 최대한 만들어 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머리가 어쩔 수 없이 원하는 걸 콕 찝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브랜드의 와이드한 데님을 입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서 품절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제품을 입어봤으나 어딘가 아쉬워 구매하지 않았다. 와이드한 데님은 생각도 않던 브랜드에서 마음에 드는 걸 만나 구매했고 여기선 역시 생각도 않던 작은 가방을 만나 구매했다. 우연히 만난 물건들에 더 애정을 쏟고 싶다.
나카메구로라는 동네도 마음에 들었다. 강을 끼고 걸었다. 벚꽃이 거의 다 졌구나 싶었는데 남아있는 지역이 있었다. 사실 벚꽃은 어디서 만나도 다 예쁘다. 강에 떨어진 벚꽃에 더 눈이 갔다.
점심엔 아후리라는 라멘집에 갔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절묘한 비율로 줄을 서 기다리는 모습이 재밌었다. 유자 라멘이 시그니처인데 난 유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궁금해서 시켜 먹었고 국물까지 거의 다 비웠다. 호기심이 승리했다.
바로 옆에 흥미로운 매장이 있길래 들어갔다. 역시나 점원에게 일본어를 못 한다고 하니 한국분이냐며 서툴지만 정확한 한국어로 물어오셨다. 한국어를 잘 하시네요! 조금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스위치 커피는 나카메구로에서 조금 더 아래쪽. 한적한 주택가인 메구로에 있다. 한적한 주택가와 골목을 걷는 건 세상에서 몇 번째로 행복한 일일까.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갔던 카페 중 가는 길이 가장 좋았다. 점원은 내가 일본어를 못한다고 하니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듯 보여 내가 뭘 실수했나? 잠시 생각했지만 그 순간 그게 그가 내비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열심히 커피를 저어서 내어줬을 리가. 시즌 블렌딩의 아메리카노는 과일 주스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돌아다니다 마트가 보여 재빠르게 들어갔다. 마트가 좋다. 생활력이 넘쳐나는 곳이라서 좋다. 생활의 힘이 빠질 때면 마트를 찾는다. 장바구니에서 나에게로 뭔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눈으로만 열심히 봐도 기운이 솟는다. 이국의 마트는 더 재밌다. 그 생활을 열심히 엿봤다.
오니버스 커피에 갔다. 바로 건너편엔 전철이 지나고 바로 옆엔 어린이 공원이 있다. 건물과 환경의 조화가 엄청나네. 생각했다. 2층에 앉아 책을 조금 읽었다. 점심에는 친구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넸고 책 속의 시 한 편은 그 친구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페이지를 찍어 친구에게 건넸다. 빌려 쓴 편지를 부친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반가움을 만났다. 어제 열심히 다닌 아오야마의 거리였다. 벌써 아는 동네가 생겼다. 이 도시와 부쩍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제 산 셔츠를 입었다. 여행지에서 산 옷은 여행지에서 입는 게 좋다. 그곳의 옷으로 그곳을 거닐기. 그곳과 친해지는 방법이다. 내일은 오늘 산 데님을 입을 생각이다.
여기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봤다. 벌써 여럿이 되어 있었다.
#동경비둘기3일차

아무래도 아침에 또 머리를 감기 귀찮아 모자를 쓰고 나갔다. 계속 이럴 것 같다.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다가 숙소 옆에 있는 저렴한 로컬 프랜차이즈에 들어갔다. 380엔짜리 규동이 이렇게 맛있는 건 반칙이다.
날이 좋았다. 오모테산도 쪽으로 가다 구글맵을 놀리며 옆길로 샜다. 그래도 부지런히 구글맵은 새길을 알려줬다. 걷다가 아이들이 뛰노는 공원을 만났다. 조금 멍을 때렸다. 마침 귀에서는 정밀아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들이 필요하겠어.’ 딱 그런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떻게 되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 얼굴이 몇 떠올랐고 같이 왔어도 좋았겠다 싶은 얼굴이 몇 떠올랐다. 오늘은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놓고 4잔 마셨다.
다시 걷는 길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강아지는 열심히 풀을 뜯었다. 그 풀이 묘지 근처의 풀이라는 게 문제였을까 아주머니는 발로 강아지를 말렸다. 그 모습이 무척 능숙해 보였고 괜히 정다웠다.
커피 마메야는 직관적인 테이블과 표 구성, 그리고 벽의 구성까지 보는 재미가 좋았다. 산미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 콜드브루가 있댔다. 과연 기가 막혔다. 오모테산도를 걷다 얼결에 좋아하는 브랜드의 샵을 만났다. 들어가 보니 마침 남성 라인을 파는 곳이었다. 독특한 질감의 셔츠를 입어봤고 직원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자기가 더 신이 나 어울리는 바지를 추천해주겠다며 갖다 줬다. 마음인지 상술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잘 어울려 모두 사고 싶던 건 사실이다. 꾹 참고 셔츠만 사서 나왔다. 첫 쇼핑. 다시 걸었다. 도쿄는 봄과 여름의 문턱에 있는 듯하다. 보이는 광경은 여름, 살에 닿는 바람은 봄이다. 라떼스트를 마주쳤다. 간만에 화이트 커피가 고파 시그니처 라떼를 마셨다. 점으로 뭉치는 고소한 맛이 좋았다. 오모테산도라는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빙빙 돌았고 지도에 찍은 적 없는 편집샵에 들어갔다. 찾던 청바지가 있어 입어봤으나 사이즈가 없었다. 점원은 무어라 말하더니 한국인이냐 물어왔다. 그렇다 했더니 자기는 동방신기를 좋아하고 한국인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마루야마 커피에 왔다. 앉으니 무슨 커다란 갱지 같은 종이를 주길래 여긴 웬 신문을 다 주는 건가? 했는데 그게 다 싱글 오리진 메뉴판이었다. 이 나라는 커피 하나도 이렇게 열심히 즐기는구나- 생각했다. 귀한 콩들이 잔뜩 있어 귀하게 한 잔을 마셨다.
아오야마로 발을 옮겼다. 가보고 싶던 브랜드의 샵에서는 바지를 입어 봤다. 괜찮지 싶었는데 가격이 좀 셌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우선 두기로 했다. 느낀 게 입어볼 때는 괜찮은데 입고 나서 안 살 때 뭐라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먹는 것에 강약을 두려고 했다. 커피를 열심히 다니며 마시는 만큼 밥까지 열심히 찾으면 귀찮을 것 같아 적당히 보이는 걸로 먹고 있었다. 그래도 다 맛있어서 괜찮았는데 조금 챙겨 먹어볼까? 생각했다. 가츠동이 먹고 싶어 조금 검색을 해서 갔다. 아주 작은 가게에 가츠동만 파는 집이었다. 다 먹고 진지하게 한 그릇 더 먹을까 고민했다. 하루에 한 끼는 꼭 제대로 먹기로 했다.
시부야는 사람이 정말 많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금방 지쳐버린다.
차테이하토우에 갔다. 메뉴판을 읽을 수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블렌딩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니까. 첫 모금 마시고 무척 놀랐다. 코가 뻥 뚫리는 그런 맛. 뭐 이런 커피가 다 있지. 책을 조금 읽다가 다시 숙소로 걸어 돌아갔다. 구글맵은 나를 인적 드문 묘지 옆길로 안내했다. 낮에는 공원 같은 느낌인데 밤에는 아무래도 좀 무서웠다.
숙소로 돌아와 씻으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먼저 타고 있던 분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셨다. 종일 거의 말을 안 해 발성법을 까먹은 느낌이었다. Asmr처럼 대답해버렸다.
#동경비둘기2일차

아침부터 배가 아팠다. 공항버스를 한 대 놓쳤다. 여유 있게 했던 준비에 여유가 사라졌다.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시각을 자주 확인했다. 괜히 뭔가 잘못되는 건 없겠지 입국 심사가 조마조마했다. 시작은 좀 석연치 않았다.
공항에서 전철을 타고 도쿄 시내로 들어올 때 창문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풍경 덕에 조마조마가 점점 사라졌다. 도심으로 들어와 숙소로 발을 옮기며 환승이 안 되는 지하철인데 딱 한 정거장을 타고 싶지 않아 그냥 캐리어를 끌고 걷기로 했다. 무작정 나선 동네에 향냄새가 자욱했다. 향냄새를 좋아하고 사찰도 좋아한다. 주변에 사찰이 많은 줄 알고 열심히 좋아라 했다. 걷다가 알았지만 공동묘지였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지나갔다. 그래도 걸을수록 마음에 드는 동네였다. 여기저기 고양이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걷는 고양이 말고 온갖 고양이 콘텐츠들이. 알고 보니 거기는 고양이 마을이란다. 왜 귀여움은 다 이 땅에 있는 걸까. 걷는 취미를 가진 나 자신을 칭찬했다.
첫 번째 숙소가 있는 아카사카는 정갈한 동네다.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한결 가볍게 다시 길을 나섰다. 만만하게 가까운 동네가 긴자였다. 마침 그쪽에 가보려던 카페 두 곳이 모두 영업 중이라 또 열심히 걸었다. 한국어가 불쑥 들렸다. 반나절밖에 안 되었는데 그새 그 말소리가 어색했다. 작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다가 간간히 보이는 좁은 틈을 보면 무서웠다. 여긴 틈이 무서운 나라구나.
먼저 도착한 토라노몬 커피는 커다란 상업 건물 안에 들어서 있어 덩그러니 완전한 개방형 매장이다. 그럼에도 선으로 커피바를 감싸 아늑함을 만든 공간 활용에 감탄하고 흥미로운 추출법과 그 맛에 또 즐거워했다.
카페드 람브르로 발을 옮기는 길엔 편의점에 들렀다. 드 람브르는 기사텐이기 때문이다. 기사텐은 일본식 전통 커피방을 의미하는데 보통 실내에서 흡연이 자유롭다. 기사텐에서는 왠지 커피에 담배를 꼭 곁들여야 할 것 같았다. 평소엔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샀다. 14년을 숙성시켰다는 원두로 내린 융드립을 먹어보고는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아졌다. 커피만으로 충분히 재밌는 맛이었거든.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럭키 스트라이크는 가방에 그대로 있다. 빌딩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긴자는 나에겐 큰 감흥이 없는 동네였다. 긴자 식스의 쿠로 매장에서 조그만 대화를 나눈 점원 형과 츠타야에서 만난 오쿠야마의 사진집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한 층의 카테고리 이름이 ‘color’ 였던 이토야 4층과 자리가 없어 함께하지 못한 워크바는 기억해두어야 한다. 도쿄에 오니 나랑 비슷한 모자를 남녀노소가 잔뜩 쓰고 다녀 괜히 고향에 온 기분이다. 숙소는 꽤 좋은 곳이다. 밝은 프런트 분위기가 내일 어디 갈까를 고민하기에 알맞다.
#동경비둘기1일차

와타시 니혼고와 요꾸 와까마리마셍

#일단쓰기
되다만 올리브색의 골이 깊은 코듀로이 바지가 하나 있다. 날이 따뜻해져 입지 못하고 있다가 조금 추워져 얼른 꺼내 입었다. 어제도 입었고 오늘도 입었다. 별다른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내일도 입을 생각이다. 이 바지의 제대로 된 이름은 ‘코듀로이 이지 팬츠’ 였던 걸로 기억한다. 코듀로이도 팬츠도 이해하기 쉬운데 ‘이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뭐가 쉽다는 걸까.
엉성하게 펑퍼짐한 모양새는 ‘이지’하다. 입는 사람에게 마음의 자유도를 10 정도 높여주는 것 같긴 하다.
관리도 충분히 ‘이지’하다. 어제는 호기롭게 뚜껑도 홀더도 괜찮다며 주인분의 걱정을 뒤로한 채 뚜껑 열린 아메리카노를 쥐고 걸었다. 걱정에 걸맞게 바지에 흘렸다. 제대로 닦을 게 없어 그냥 걸었다. 나중에 찾아봐도 어디에 흘렸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막 굴리기에 쉬운 바지다.
바지에는 아무런 단추도 지퍼도 없다. 쓱 올려 입고 쓱 내려 벗는다. 허리는 여유 있는 바지라서 반드시 달린 끈을 묶어줘야 한다. 묶는 건 괜찮지만 푸는 게 고역이다. 화장실에 갈때마다 짧게는 20초에서 길게는 3분을 끈을 푸는 데 쓴다. 매듭이 잘 풀리지 않아 끙끙대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 적 있다. 그 꼴이 아주 우스웠다. 커피도 물도 많이 마셔서 화장실에 자주 가는 나에게 이 바지는 아주 ‘언-이지’하다. 꼬투리 잡을 게 하나 생겼다. 이렇게 쉽게 쉬운 이름을 붙이다니 무책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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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팬츠는 좋다. 하지만 그 언-이지함은 싫다. 기대고 싶은 달콤한 말은 좋다. 잠깐만 좋다. 결국에는 싫어진다. 그래서 타로점이 싫다. 9월의 타로 아주머니가 밉다. 10월에는 깜빡 속아 아주머니를 떠받들었다. 11월엔 다시 미워했다. 12월엔 잠시나마 또 속았고 4월인 지금 여전히 밉다. 정확히는 말이 밉고 말에 기대보려 했던 내가 별로다.
간호사로 일하는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은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을 미리 맞아본다거나 시술을 받아보는 거냐고. 친구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당연히 아니라고 말했다. 다행이다. 어린 날의 내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겠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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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플 거예요. 이건 안 아파요.’ 하는 말이 싫었다. 간호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은 늘 나에게 뭔가를 할 때면 저 말을 붙이곤 했다. ‘직접 맞아보셔서 이게 얼마나 아픈지 다 아시는 걸까? 어떻게 그걸 아시는 거지?’ 궁금했다. 아플 거라고 했던 게 나에겐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고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게 나에겐 무척 아팠던 적도 많았다. ‘남의 고통을 이렇게 쉽게 판단해도 되는 건가’ 생각했다. 그런 건 싫었다. 덕분에 누구의 고통도 쉽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위로는 어렵다. 가만히 들어줄 때가 대부분이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뭔가를 말하고 싶어지면 내 이지 팬츠의 허리끈이 떠오르고 9월의 타로가 떠오르고 주삿바늘이 닿기 전의 아프지 않을 거라던 말이 떠오른다. 그럼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게 그 정도라서 나 역시 그 정도를 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 말도 바라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진심으로 나의 안녕함을 물어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 역시 온 마음으로 묻는다. 기획력과 실행력을 겸비한 분들을 곁에 둔 덕이다. 3회차 기획도 이미 마쳤다.(오늘의 유일한 거짓말.)

사람또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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