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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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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딩의 삶이란...(feat.외국계) 야근식대로 인스턴트 왕창먹고 후회하는 그것🙃
#삼일절#출근하는삶#1919년3월1일#역사를잊은민족에게는미래는없다

1919년 3월 1일,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합니다. #삼일절 #1919년3월1일 #3월1일

3/1 레브에서 무료배송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 단하루이니 놓치지 마세용, ♡

#1919년3월1일 #삼일절 #🇰🇷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3_1절#1919년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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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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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외취다 순국하신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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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도 좋지만 옆도 볼줄아는
뒤를 돌아볼줄 아는 그런 아이가 되었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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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3월1일
#잊지말자지금우리는
#간접경험
#23개월아기랑
#유관순체험 #태극기가바람에펄럭입니다🇰🇷

(2)

두려움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용기가 되고 용기가
행동이 되고 행동이 신념이 되면 역사가 된다!! 내 나라를 잃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자존감 대신 억압과 공포 그리고 상실감이 들었던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시절... 우리 선조는 분노하고 용기내어 독립도 외치고 결국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수많은 민주항쟁도...촛불도 그래서 다들 분노하여 용기내고 나와 외쳤겠지요.

이젠 그것을 현실로 만들고 역사에 남겨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부터 아프고 슬픈 이들의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고 그것에 함께 가고자 하는 이들을 정치일선에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내 고장 사람이라...
내가 지지하는 당이라...
그냥 냐 마음에 들어서...
내가 그리워하는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말예요
#1919년3월1일 #평안남도_맹산군 #천도교인_기독교인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독교인_지도자_체포_고문 #석방요구 #일본헌병_총격 #60여명_학살 #맹산학살사건

#빼앗긴_들에도_봄은_오는가 #이상화_작시 #변규백_작곡 #노래를찾는사람들_노찾사_1991년_원곡가수 #안치환_2006년_리메이크

나는 온 몸에 햇쌀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 붙는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 속을 가듯
정처없이 걸어 가네 걸어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울린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걸어 봄신명이
가슴에도 지폈네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이가 짚신매 듯
그들이라도 보고 싶네 보고만 싶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1)

1919년 3월1일 평안남도 맹산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일본 헌병에 의해 60여명이 총살당하는 맹산학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월 1일에 기미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이 비단 서울만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북부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들 도시가 서울과 같은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연락이 쉬웠기 때문이고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측 대표 16인의 대부분 이 지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지역이 바로 평안남도 맹산으로 1919년 3월1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하였다네요.

이에 군중들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은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총격을 가하여 60여명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3월 1일에 점화된 기미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서울 · 평안남도 · 평안북도 · 함경남도 지역의 시위에 이어 2일에 경기도의 개성, 3일에 충청남도의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등 날이 갈수록 전국 각지로 번져갔지요.

#1919년3월1일 #평안남도_맹산군 #천도교인_기독교인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독교인_지도자_체포_고문 #석방요구 #일본헌병_총격 #60여명_학살 #맹산학살사건

(8)

동빙한설에 호흡을 폐칩한 것이 피일시의 세ㅣ라 하면 화풍난양에 기맥을 진서함은 차일시의 세ㅣ니, 천지의 부운에 제하고 세계의 변조를 승한 오인은 아모 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기탄할 것 업도다.
아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하야 생왕의 낙을 포향할 것이며, 아의 자족한 독창력을 발휘하야 춘만한 대계에 민족적 정화를 결뉴할지로다.

오등이 자에 분기하도다.
양심이 아와 동존하며 진리가 아와 병진하는도다. 남녀노소 업시 음울한 고소로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부러 흔쾌한 복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천백세 조령이 오등을 음우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하나니, 착수가 곳 성공이라.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인뎌.

공약삼장

일.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ㅣ니, 오즉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현재 기미독립선언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재청을 통해 2016년 10월 20일 서울서예박물관이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에서 소유하고 있는 기미독립선언서와 이희선씨가 서울 강동구에서 소유하고 있는 기미독립선언서 등 2건의 문서를  등록문화재 제664-1호, 제664-2호로 각각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헌법에 명시되듯 대한민국 법통의 전통적 기초가 되는 기미독립만세항쟁 기념일인 3.1절!! 이날은 조선국기라 불리던 우리 국기의 새로운 이름 태극기가 널리 알려진 날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총칼앞에 태극기와 맨손으로 저항하며 독립과 평화의 의지를 전국적으로 전민중이 표출한 그 날의 결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그아래 뭉쳐서 독립된 조국에서 살수 있었지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때 순국하신 모든선열들의 명복을 빕니다!

#1919년3월1일 #일본_제국주의_강제점령기 #대한제국_고종태황제_독살설 #미국_윌슨대통령_민족자결주의_영향 #고종의_장례_계기 #일본_제국주의지배_항거 #경술국치무효_한반도독립_선언 #비폭력만세운동_시작 #기미독립만세운동

#삼일절노래

#정인보_작사 #박태현_작곡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현대어 번역👉‘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7)
( 기 미 독 립 ) 선 언 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하야 차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야 차를 포명함이며,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발전을 위하야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하야 차를 제기함이니, 시ㅣ 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ㅣ며, 전인류 공존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하물이던지 차를 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하야 유사이래 누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 겸제의 통고를 상한 지 금에 십년을 과한지라. 아 생존권의 박상됨이 무릇 기하ㅣ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ㅣ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ㅣ 며,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문화의 대조류에 기여보비할 기연을 유실함이 무릇 기하ㅣ뇨.

희라, 구래의 억울을 선창하려 하면, 시하의 고통을 파탈하려 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의의 압축소잔을 흥분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수하려 하면,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 재산을 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자자손손의 영구완전한 경복을 도영하려 하면, 최대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케 함이니,이천만 각개가 人마다 방촌의 인을 회하고, 인류통성과 시대량심이 정의의 군과 인도의 간과로써 호원하는 금일, 오인은 진하야 취하매 하강을 좌치 못하랴.
퇴하야 작하매 하지를 전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 이래 시시종종의 금석맹약을 식하얏다 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안이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아 세종세업을 식민지시하고, 아 문화민족을 토매인우하야,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오, 아의 구원한 사회기초와 탁한 민족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소의함을 책하려 안이 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오인은 타의 원우를 가치 못하노라.
현재를 주무하기에 급한 오인은 숙석의 징변을 가치 못하노라.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할 뿐이오, 결코 타의 파괴에 재치 안이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기된 일본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불자연, 우 부합리한 착오상태를 개선광정하야, 자연, 우 합리한 정경대원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서 출치 안이한 량국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 위압과 차별적 불평과 통계수자상 허식의 하에서 이해상반한 양 민족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업는 원구를 거익심조하는 금래실적을 관하라. 용명과감으로써 구오를 확정하고, 진정한 리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하는 첩경임을 명지할 것 안인가.
또, 이천만 함분축원의 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 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차로 인하야 동양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스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 전국이 공도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하니, 금일 오인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수케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사로로서 출하야 동양 지지자인 중책을 전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하지 못하는 부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한 감정상 문제ㅣ리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내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1919년3월1일 #일본_제국주의_강제점령기 #대한제국_고종태황제_독살설 #미국_윌슨대통령_민족자결주의_영향 #고종의_장례_계기 #일본_제국주의지배_항거 #경술국치무효_한반도독립_선언 #비폭력만세운동_시작 #기미독립만세운동

(7)

한민족은 그러나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만세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국가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어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지요.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외신반응을 보면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

고 기록했고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

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인들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3.1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시절부터 수립과 함께 건국에 버금가는 중요 기념일로 지내왔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에서도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3.1절을 경축일로 지정했고 그해에 미군정 문교부장관 안호상선생의 의뢰로, 위당 정인보선생이 가사를 쓰고 당시 숙명여대 음악과 강사였던 작곡가 박태현이 곡을 붙인 '삼일절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당시(1919년) 한반도의 인구는 이천 만이 채 되지도 않았으므로, 삼일절 노래의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라는 가사가 오류로 지적받기도 한다네요.

이후 정식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1949년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3.1절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쉬며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답니다.

이에 매년 대한민국 정부가 기념행사를 주최하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묵념을 올리고, 민족정신을 되새기는데 행정.입법.사법의 3부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참석한다고 하며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탑골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고 합니다.
또 이 날 대한민국의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그러나 심야에 종종 폭주족이 과속 운행을 할 때가 많아 이 때 특히 경찰의 단속이 심해지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대한민국과 일본간 일부 네티즌사이에 이른바 사이버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지요.

그리고 2010년 2월28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휴식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네요.

현재 대한민국의 일부 사학계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만세운동이라는 평화적 항쟁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중국의 5·4 운동은 러시아 혁명이라는 볼셰비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민중의 폭력적 시위와 연결되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는 중국의 5·4 운동에 대해 무산계급 투쟁의 불완전성에 의한 한계가 있었다는 담론이 파급되고 있다 합니다

#1919년3월1일 #일본_제국주의_강제점령기 #대한제국_고종태황제_독살설 #미국_윌슨대통령_민족자결주의_영향 #고종의_장례_계기 #일본_제국주의지배_항거 #경술국치무효_한반도독립_선언 #비폭력만세운동_시작 #기미독립만세운동

(6)

박중양선생은 이에 4월 6일 대구부청 앞에서 시위 참여자를 자제 내지는 설득하여 귀가시키거나 진압하기 위한 '자제단 발기인회' 를 조직하고 자제단 본부 단장과 대구 자제단 본부장도 겸임하면서 자제단 조직 성명서에서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

면서,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이 자제단 결성 취지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후 경상북도에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조직되었고. 5월에는 경상남도 부산, 밀양, 창원, 사천, 통영 등지에 자제단이 구성되었으며, 6월에는 청주, 충주, 천안, 아산, 제천, 청주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결성되고 6월 27일 옥천군 옥천면에서 정석용에 의해 옥천 자제단이 조직되었답니다.

이들 자제단은 1919년 12월까지 각지에서 만세운동 참가자들에게 무력 시위를 자제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거나 호소하고 만세 운동을 해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의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공식적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으로 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인 ‘소요’ 정도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천변괴이의 상”

이라고 표현하여 당시 일본인의 개인적인 평가와 일본 정부의 평가 사이에 다른 점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기타 관련 인물 및 단체편집※※※ 1)신한청년당 - 김규식선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2)유관순열사 - 이화학당 학생으로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주도
3)김규식선생 -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국내에서 사건이 발생해야 조선인의 운동을 홍보한다고 주장, 만세운동의 빌미를 제공
4)김순애선생 - 신한청년당 비밀연락원,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국내에 전달
5)여운형선생 - 신한청년당 당수, 신한청년단을 조직
6)우드로 윌슨 - 미국 대통령, 민족자결주의 제안
7)김향화열사‎ - 기생출신으로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8)정칠성열사 - 기생출신으로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9)신익희-윤치영-이광수선생 - 2.8 독립선언을 주도
10)신태윤열사 - 유관순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만세운동 참가, 천안경찰서 헌병대에 투옥되어 고문받고 태형으로 처분됨
11)조병옥선생 -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관련
12)임영신열사 - 여교사로 당시 공주, 천안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13)상하이 임시정부 - 만세의 영향으로 파생된 단체
14)허정숙
15)박헌영
16)한성 임시정부

기미독립만세운동은 그동안 한반도에 대해 강경책 내지는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 통치를 고집하던 일본 정부나 총독부로 하여금 기존의 무단통치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했고 결과 군인출신인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회유적인 문화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는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조차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사실상 명칭만 변경된 것으로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되며 경찰력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네요.

즉,일본은 문화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교육만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였으니 문화통치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19년3월1일 #일본_제국주의_강제점령기 #대한제국_고종태황제_독살설 #미국_윌슨대통령_민족자결주의_영향 #고종의_장례_계기 #일본_제국주의지배_항거 #경술국치무효_한반도독립_선언 #비폭력만세운동_시작 #기미독립만세운동

(5)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에,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에만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몇십 만명이 동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빠른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들은 진압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그에 더 자극 받은 한국인들의 운동이 그 규모를 더하였다.' 기미독립만세운동 준비 당시 윤치호선생과 이상재 선생등은 당시 국내의 민족독립운동가들로부터 민족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부의사를 밝혔고 이승만 등은 너무 멀리 있어서 서명을 받는데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하고 실패를 예견하며 거절한 윤치호선생은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 이후 에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한 누군가에 의해 미신과 유언비어가 확산되고 있어서 동조할 수 없다고 밝힌 기독교 운동가 이화여자중학교 김창제교사의 견해에 공감하여 만세운동지도자들을 경술국치 이후에도 순진한 애국심으로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무모한 행동을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혐오하고 경멸한 뒤 기미독립만세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고 합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던 윤치호선생은  3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경성일보에 다음과 같이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일본)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더욱 심한 비판을 받게 됐으나 곧 이완용과 예종석 등의 3.1 운동 반대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완용, 예종석 등에 대한 성토여론이 조성되어 무마됐답니다.

그러나 이후 만세운동으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일본 제국주의 경찰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던 윤치호선생은 5월 31일 7,8명의 젊은이가 종각 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순국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면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잔인한 진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를 마련하여 국내외에 한국인에 대한 시각을 개선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편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하여 누군가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유언비어가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 시위로 만들고 급기야는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을 유도했다'며 비판하였던 김창제교사는 이후에도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점을 지적하며 다수의 생각과 다수가 참여해서 움직이는 선택이
반드시 올바르고 반드시 선량한 일이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아울러 다수의 선택이 무조건 올바른 선택이고 민주주의라고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다수의 목소리가 곧 주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도 다수의 요구잖아요.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연합이었잖아요.” #1919년3월1일 #일본_제국주의_강제점령기 #대한제국_고종태황제_독살설 #미국_윌슨대통령_민족자결주의_영향 #고종의_장례_계기 #일본_제국주의지배_항거 #경술국치무효_한반도독립_선언 #비폭력만세운동_시작 #기미독립만세운동

(4)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현대어역)]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지자, 그것에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이 때,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던 시기라 이들 중 많은 인원과 서울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참여한 시위군중은 수십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에 시위 군중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고 그들중에 대한문에 이른 군중들을 이끌던 사람이 고종의 시신이 안치된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날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행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 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을 때 어느 학생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쓴 태극기를 높이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당시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며 깊은 동의를 표했고 이에 한 사람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였다네요.

그러나,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할 때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시위군중 해산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오후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자 다음날에서야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답니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어 천안 아우내장터를 거쳐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간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초기에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어 약 3개월 가량 시위와 폭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더욱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오히려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등에 따르면 3개월간 1,542회 열린 만세운동시위에 1919년 3월 당시 한반도의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106 만여 명~ 202만 3089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 553명~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다치고 1만 2천여 명~ 4만 7천여 명이 구속된 한편 715호의 민가와 47개소의 교회 및 2개교의 학교가 불타거나 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교수는 당시 전국에서 고종의 장례를 위해 50만명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이 대부분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기미독립만세운동 참여자는 1919년 3월 당시 한반도의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2.97%인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네요.

한편 한국의 학자 신복룡교수는 1919년 3월 당시 한반도의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2.76%인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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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통해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 선생에게 전달되었고 이종일 선생은 1919년 2월26일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 선생과 함께 2만 1,000매를 인쇄하였는데 이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이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뒤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종일선생의 보고를 받은 최린선생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하는데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 때문에 날짜가 3월 1일로 2일 앞당겨졌다네요.

한편 인쇄를 마친 선언서 인쇄본들을 모두 경운동(慶雲洞) 자기 집으로 운반한 이종일 선생은 1919년 2월 28일부터 천도교와 개신교 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19년 2월 28일경 천도교 교주 손병희선생의 집에 모인 민족대표가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애초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모일 장소가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뀌었다네요.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선생 등을 제외한 29인이 모였고 태화관에서 한용운 선생의 선언서 낭독후 축배를 들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모든 행사가 끝난 오후 4시 무렵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으므로 곧 60여 명의 일본 제국주의 헌병들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 29인을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고 저녁무렵에 길선주목사 등 태화관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던 나머지 4인도 중부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네요.

이렇게 기미독립만세 운동의 첫 날인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거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을 민족 대표자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독립선언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박인호, 김홍규, 노헌용, 이경섭선생 (이상 천도교), 김도태,안세환, 함태영, 김원벽, 김세환선생 (이상 기독교), 임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강기덕, 정노식, 김지환, 한병익 선생 등을 합쳐 보통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르고 그밖에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해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에 알린 스코필드 역시 별도의 조선인 민족대표자로 보기도 한다네요.

스코필드를 제외한 49인은 모두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반면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변경소식을 듣지 못한 학생 천여명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오후 3시경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선생,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선생 그리고 한위건선생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서는 등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 선생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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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된 뒤, 1918년말부터 독립운동의 3대 원칙, 즉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주장해 온,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선생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儒林) 등 각 종교 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하여 1919년 2월 상순, 대한제국의 고관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에게 독립선언서의 서명자가 되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독립청원서를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선언서 발표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박영효(朴泳孝)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의 완강한 거부에, 한때 운동이 포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항일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면서 이들은 다시 종교단체와 교섭을 벌였는데, 먼저 기독교 측의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만나 천도교와 함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이라는 승낙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는 한편, 불교 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여 한용운(韓龍雲)선생에게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 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졌다지요.
그러나 한용운선생이 교섭했던 유림측의 참가는 실패하여 유림측의 합류는 포기하고 말았고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을 두고도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천도교 측이 내세웠던 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자는 의견에 대해 일부에서는 청원서만을 내고 선언서는 발표하지 말자는 의견 대립이 발생한 것이었으나 최린 선생이 “청원서나 건의서를 내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 독립을 시켜달라고 청원한다든지 건의해보는 것이므로 민족 자결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적으로 전민족을 분기시키고, 국외적으로 전세계에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 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되었고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는 최린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 전국에 이미 알려졌고, 서구적 교양과 재래의 학문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뛰어난 사람이라며 “전민족의 의사를 표시할 독립선언서와 같은 중대한 글을 지을 사람은 그 밖에 없다”

고 추천하였던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섭외됐는데 최남선 선생 자기 자신이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선언서는 작성하겠다.” 고 함으로써 선언서의 작성 문제는 일단 그에게로 낙착되었으나 이에 최남선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는데 만해 한용운 선생이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며 독립운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여 자신이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최남선 선생의 초안을 춘원 이광수 선생이 교정한 뒤 만해 한용운이선생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네요.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고 만세 시위 계획 시간과 장소는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3일 오후 2시 탑골공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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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대한제국 고종태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항거하여 경술국치 무효와 한반도의 독립을 선언하며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날짜를 본따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이라고도 부르는 전 민중의 독립운동사건이었습니다.
1910년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무단 통치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총독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2대 조선총독으로 계승된 가운데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소련 지도자 레닌의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하여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 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 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1919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자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 선생의 발언을 현실화 할 기회로 절묘하게 포착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선생 등은 민족자결론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프랑스어가 능통한 김규식선생을 파견하며, 한반도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선생을 파견했는데 1919년 1월26일 출국 전 김규식 선생이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 윤치호선생의 일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남긴 독립 시위 주문은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또한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이 왕세자(영친왕 이은)와 나시모토 공주(이방자)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의 일본 공주와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한편 여운형선생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만주 지린(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 선생등에게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지요.

1918년 말 드디어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무오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세상에 처음 주장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2·8 독립선언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고 있던 한반도로 이광수 선생 등에  의해 전해져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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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March 1) marks the 98th anniversary of the #Samiljeol/#March1stMovement. Many South Koreans demonstrated their demand for independence from Japan, but 7,509 people were killed. Let us not forget. #삼일절 #1919년3월1일 #SouthKorea #대한민국 #한국 #🇰🇷 Coverage courtesy of #ArirangNews. #Arirang #아리랑 #아리랑뉴스

#삼일절 #1919년3월1일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날. 기쁨의 눈물도 안도의 눈물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눈물도 있었을 그 때 그 날 1919년 3월 1일.
이 날이 있기까지의 값진 생명들과 희생으로 지금의 이 땅과 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7년 3월 1일 그 마음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98th anniversary of the day we began calling for independence. #31절🇰🇷 #1919년3월1일 #유관순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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